지난 글에서 우리는 '미움받은 딸'로 기억된 화협옹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또 한 명의 딸은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조선의 임금 영조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사랑했던 맏딸. 그러나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 누구보다 사랑받았던 딸의 죽음이 한 집안 전체를 비극으로 밀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1748).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자, 사도세자와 화협옹주의 친누이입니다.

형벌마저 멈추게 한 사랑
화평옹주가 영조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녀가 다섯 살 때의 한 사건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1731년, 어린 옹주가 천연두를 앓자 영조는 나라의 모든 추국과 형신, 즉 죄인을 심문하고 벌하는 일을 전부 멈추게 했습니다. 당시 천연두는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불리며, 환자가 있는 동안에는 부정 탈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금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딸의 병을 위해 국정의 한 축을 멈춰 세운 것이죠. 다행히 옹주는 건강을 회복했고, 그해 화평옹주로 책봉됩니다.
도를 넘은 편애
영조의 딸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말이 많아질 정도로 커졌습니다. 1738년 옹주가 박명원과 혼인할 때, 그 예물의 화려함은 당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왕녀들의 혼례를 주관하던 한 인물은 "화순옹주의 혼례가 앞선 옹주보다 열 배는 풍성했는데, 화평옹주의 혼례는 그보다도 더하다"고 평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영조는 옹주의 신혼집을 마련하기 위해 경복궁 옛터의 소나무를 베어다 목재로 쓰게 했고, 이 과정에서 담당자들이 이를 빙자해 이익을 챙기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임금의 사사로운 애정이 국가의 자원과 질서에까지 영향을 미친 셈입니다.
『한중록』은 이 편애를 더 생생하게 전합니다. 영조는 화평옹주를 보러 갈 때면 더없이 환하게 웃었지만, 사도세자나 화협옹주를 대할 때는 차가웠고, 심지어 사도세자와 말을 섞은 뒤에는 귀를 씻고 양치질을 했다고 합니다. 부정을 씻어내듯 자식을 차별한 이 기이한 행위는, 화평옹주를 향한 사랑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사랑받았으나, 행복하지 않았던
여기서 이 이야기는 단순한 '편애받은 공주'의 동화에서 벗어납니다. 화평옹주는 자신이 받는 사랑이 형제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저를 지나치게 아끼지 마소서, 세자가 있지 않습니까"라며 편애를 거두어 달라 청했다고 전해집니다. 영조는 끝내 듣지 않았지만요.
더 중요한 역할이 있었습니다. 화평옹주는 사도세자가 실수를 저지르면 감싸주었고, 동생을 향한 영조의 분노가 폭발할 때마다 그 사이에 서서 아버지의 마음을 누그러뜨렸습니다. 가장 사랑받는 자식이라는 위치를, 그녀는 형제를 지키는 방패로 썼던 것입니다. 저는 이 지점이 화평옹주라는 인물의 진짜 깊이라고 생각합니다. 받은 사랑을 독차지하지 않고, 그것을 가장 약한 동생에게 흘려보내려 한 사람. 비극은, 그런 사람이 너무 일찍 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스물둘, 무너진 균형
1748년, 화평옹주는 스물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영조의 슬픔은 깊었습니다. 그는 옹주가 죽은 뒤에도 한참 동안 사위 박명원을 보러 그 집에 들렀고, 수십 년이 지난 정조 때에 이르러서야 영조의 친필 비문을 새긴 묘비가 파주의 묘역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이 남긴 진짜 파장은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한중록』은 화평옹주가 떠난 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궁중에서 사라졌고, 그때부터 부자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완충지대가 사라진 두 사람은 점점 더 자주, 더 깊이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나고 14년 뒤인 1762년,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여드레 만에 숨을 거둡니다.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인 임오화변입니다. 물론 이 참극의 원인은 노론과 소론의 정쟁, 사도세자의 병증 등 여러 갈래가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이에서 아버지의 화를 풀어주던 누나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질문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 속에 떠올리는 가정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여담도 있습니다. 화평옹주의 남편 박명원은 훗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8촌 동생을 수행원으로 데려갔는데, 그가 바로 연암 박지원입니다. 이 여정에서 탄생한 기록이 우리가 아는 『열하일기』입니다. 한 옹주의 혼인이, 뜻밖에도 조선 후기 최고의 여행기와 이어져 있는 셈입니다.
마치며
화협옹주가 '미움받았다'는 기록에도 아버지의 눈물을 받은 딸이었다면, 화평옹주는 '가장 사랑받았다'는 기록 뒤에 가족을 지키려 애쓴 딸이었습니다. 두 자매의 삶을 나란히 놓고 보면, 영조라는 한 아버지의 모순된 사랑과 그 사랑이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가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사랑받은 자식이 떠나자 한 집안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사랑이 때로 한 사람에게 얼마나 무거운 무게로 얹히는지를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화평옹주를, 행복한 공주로 기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가족의 균형을 홀로 떠받치다 일찍 스러진 사람으로 기억하시겠습니까?

함께 읽으면 좋은 글: 「미움받은 딸이라더니, 아버지는 직접 묘비를 썼다 — 화협옹주 이야기」
이 글은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위키백과의 화평옹주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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